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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문학과 음악, 거장들의 만남

아시아 출신 지휘자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는 누구일까. 한국인이야 자연스레 정명훈이 생각나게 마련이겠지만,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세와 함께 실력을 인정받는 이들은 일본의 오자와 세이지, 그리고 인도의 주빈 메타일 것이다. 특히 유럽과 미국 두 대륙의 ‘most popular maestroes’ 라 할 수 있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레너드 번스타인 두 거장의 직속 제자였고, 보수적인 도시 보스턴의 오케스트라를 30여년 가까이 맡아 지휘하며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데다, 세계 클래식의 가장 유명한 연례행사인 ‘빈 필하모닉 신년 연주회’ 의 지휘까지 맡았던, 오자와 세이지는 그 이름만 가지고도 세계 어디에서든 ‘sold out’을 당연시할 수 있는 이가 아닐까. 

일흔이 다 되어 식도암 투병을 하며 쉬고 있던 오자와 세이지를,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나 음악과 삶, 추억에 대해 이야기한 대담집이 출간되었다. (2011~2012년 정도에 이뤄진 대화들이다) 하루키라 하면 자연스레 재즈가 떠오르지만, 실제로 그는 클래식 음악에 ‘완전히 미쳐있는’ 수준의 애호가로서,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클래식 음악의 의의, 복선, 활용법 등에 대한 분석서가 따로 존재할 정도이다. 




그래서 이 책은 사실 하루키의 팬이라고 무턱대고 들 것은 아니다. 주로 오자와 세이지의 음악인생과, 지휘법, 특정 레코드에 대한 비평과 연주자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클래식 음악과 예술을 대하는 태도 등에 대한 심도있고 전문적인 대화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가령 브람스 심포니에서 호른, 플룻의 호흡을 정지시키지 않게 만드는 작곡법의 의미나, 말러의 음악이 쇤베르크나 알반 베르크와는 왜 다른지,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왜 그렇게 콘서트를 취소해댔는지. 이런게 나온다는 말이다. 이런 것에 흥미를 느끼고 정독하는 약간 미친 인간들은 나 말고 주변에서 본 적이 없기도 하거니와, 그렇다고 이게 왜 재미있는지 설명하다가는 되레 핵노잼 소리나 들을 게 분명하기에, 벌써 약간 지루하다면 앞으로도 긴 글이 될 것이외니 백스페이스를 살포시 눌러 주시라. 

                                                                                                 

여기서부터는 이 책에 등장하는 몇 개의 앨범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D단조. 웅장하게 시작하는 이 곡을 세이지 선생과 하루키가 함께 들으며 이야기 한다. 놀랍게도 주제는 1962년 4월 6일, 레너드 번스타인의 뉴욕필과 글렌 굴드가 협연한 50여년 전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이 날의 협연이 두고두고 클래식 역사에 남는 이유는, 막 명성을 얻어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애송이에 불과했던 글렌 굴드와, 당시 뉴욕 최고의 유명인 중 하나였던 대지휘자 번스타인이 만나,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브람스를 창조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날 번스타인은 협주를 지휘하러 무대 위로 나온 후, 이례적으로 청중에게 4분가량의 ‘사전 양해말씀’ 을 전한다. 요지는, 지휘자 옆 피아노에 앉아있는 미스터 굴드 군이 원하는 템포에 맞게 지휘할 예정이니 놀라지 말라는 것. (이 announcement 역시 해당 앨범에 수록되어 있을 정도다) 그리고 연주된 브람스 협주곡 1번은, 상식을 파괴하는 느린 속도로 진행되어 다른 연주자들의 그것보다 10분 이상 늦게 종료되었다. 

그리고, 50여년 전 이 자리에 바로 오자와 세이지가 레너드 번스타인의 부지휘자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세이지는 번스타인이 이례적으로 굴드의 의견을 받아들여 비판을 감수하고 그런 템포를 채용한 것에 대해 설명하며 ‘유별나게 느리지만 굴드가 이렇게 치면 어째 납득된다’ 고 옹호하기도 한다. 

(번스타인 vs 굴드..1962년의 브람스)

세이지는 굴드와의 추억이 꽤 많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자신만의 확고한 믿음과 과거의 연주를 과도히 교범삼지 않는 과감함, 그런 글렌 굴드에 대해 “글렌이 죽고나서 그런 자세를 이어받아 발전시키려는 사람이 안 나왔다. 그는 역시 천재였던 걸까. 무엇보다도 그만큼 용기있는 사람이 없다” 고 아쉬워한다. 

또한 오자와 세이지에게 특별히 의미있는 레파토리는 바로 ‘말러’ 였다. 사실 말러의 교향곡의 경우, 그가 주로 활동한 1900년대 초반이 지나면 2차대전 후까지는 그의 제자 브루노 발터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루지 않았던 음악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복잡하고, 기묘하게 조성을 뒤흔들며, 스케일이 큰 이 음악을, 오자와 세이지도 일본을 떠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세이지에게 말러는 유럽 태생이나, 바흐에서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로 이어지는 독일 음악의 큰 조류에 반항하는 메타포로서, 그리고 유럽 한가운데 외롭게 놓인 이방인 (말러 역시 유태인이었다) 의 슬픔의 정서로서 이어지는 공감이 있었던 듯 하다. 


(이 영상은 오자와 세이지가 별동대처럼 만든 사이토 기넨 오케스트라의 말러 1번)


아래는 오자와 세이지가 미국으로 건너온 후, 처음으로 녹음한 앨범. 해롤드 곰버그라는 오보에 주자와,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현악기 주자들이 따로 모여 만든 ‘컬럼비아 체임버 오케스트라’ 의 협연이었다고 한다. 

(사진출처:http://goo.gl/Sd4RKj)

                                                                                                 

오자와 세이지와 무라카미 하루키가 꺼내놓은 이야기 중 흥미로웠던 부분도 일부 소개한다. 

‘오자와 세이지는 20대 초반에 미국으로 건너갈 때, 영어를 거의 못하는 상태였지만 친절한 ‘굿 아메리칸’ 번스타인은 세이지가 이해할 때까지 천천히 설명해 주는 좋은 스승이었다'

‘카라얀은 독재자 이미지가 컸지만, 사실 오케스트라에게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많은 자유를 줬던 지휘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큰 틀의 프레이징 구성이라든지, 소리의 방향성 같은 부분에서는 그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전권을 쥐고 있던 강한 지휘자였음에는 분명하다'

‘세이지는 유진 오르망디의 지휘봉을 훔친 적이 있다 ㅎㅎ'

‘번스타인은 오자와 세이지의 큰 딸이 태어났을때 축하하러 와서 너무 높이 갓난아이를 들어올려 던지는 바람에 그의 부인에게 혼난 적이 있다'

‘세이지가 이탈리아에서 야유를 들었다는 말에, 하루키는 보스턴 레드삭스 팬들이 케빈 유킬리스에게 ‘유~~’ 하고 응원했던 것과 비슷한 게 아니냐고 위로한다..아마도 오자와 세이지가 보스턴에 아주 오래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드립 아니었을까'

‘아직 일본에서 학생 신분이었던 오자와 세이지를 미국에서 유명세를 얻게 만들어준 장본인은 뉴욕 타임즈의 클래식 전문기자였던 해럴드 숀버그였다. 그런데, 해럴드 숀버그는 당시 뉴욕필의 상임지휘자였던 레너드 번스타인의 천적같은 존재였다. 닥치고 까보자는 주의로 번스타인을 싫어했던 기자였던 것이다. 세이지가 뉴욕필의 부지휘자가 된 후, 이 때문에 번스타인에게 꽤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이 책을 덮고나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단연 ‘평행과 역설’ 이라는, 다니엘 바렌보임과 에드워드 사이드의 대담집이다. ‘평행과 역설’ 에서 유태인인 바렌보임과, 팔레스타인 출신인 사이드는 ‘균형’ 잡힌 세계관을 바탕으로 음악, 철학, 정치 등에 대한 지혜롭고 정의로운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오자와 세이지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를 두고 ‘평행과 역설’ 을 떠올린 것은, 이 두 책이 모두 대지휘자와 나눈 대담을 기록한 것이기도 하지만, 각자의 분야에서 범세계적인 존경을 받는 이들이 만나 쏟아내는 그 압도적인 지적 열정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혹여나 여기까지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백스페이스를 누르지 않고 읽어내려왔다면, 이 두 책을 모두 사서 읽어보라. 여기까지 온 당신은 아마도 조금만 더 버티면 클래식의 매력을 비로소 알 가능성이 5% 정도는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내내 궁금했던 건 따로 있다.

번스타인과 카라얀의 옆에서 공부하며, 안네 소피무터와 크리스티안 짐머만, 알프레드 브렌델과 협연하고, 빈 오페라하우스의 음악감독이라는 (한때 세계 클래식계의 최고 자리라 불렸던) 명예까지 얻는 삶. 음악의 정수를 관통하는 본능과, 그 심오함을 양지로 꺼내 대중에 소개하는 삶.

그리고 이미 얻은 문학적 성취를 바탕으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낮에는 책을 쓰고, 밤에는 취미로 무지하게 수집한 재즈와 클래식 음반을 들으며 명상을 하는 삶. 매일같이 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삶.

그런 삶들이 정말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나는 여전히 예술가가 되고 싶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