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에 대한 해설서.
개념에 대한 적용보다, 부르디외의 개념들을 이론적인 수준에서 점검하는 철학적 훈련을 목표로 하는책.
자세히 보고 생각할 거리가 좀 많았는데, 뭐.. 문화자본이나 아비투스를 갖다가 어쩌고 저쩌고 할 건 아닌 듯 하지만, 그래도 조금만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면..
# 취향은 이데올로기 역할을 한다. 문화 취향의 차이는 개인의 본성으로 설명되는 것이 보통인데, 이러한 이유로 차이는 마치 개인적이며, 자연적인 것으로 오인된다. 이 과정을 통해서 경제적 계급적 차이가 은폐되는 것이다.
>> 아비투스는 후천적으로 자기가 소속된 사회환경에 의해 적용되는 습성. 고급-저급 의 개념을 떠나, 문화 자본의 소유 여부가 이데올로기 지배의 정당화를 가져온다. 그렇다면 한 때, 이 고착화를 해체할 강력한 대안 도구로 떠올랐던 인터넷은 현재 어떠한가? (인터넷 업계의 중심에 있는 우리는) 어떤 관점을 가지고 문화 컨텐츠들을 해독하고 있는가?
# 한국 사회 구성원들 대다수가 본인의 생애에서 상승 이동을 하면서 새로운 문화자본을 취득한다......문화가 계급을 재생산한다는 논리는 부르디외가 현대 사회를 분석하면서 늘 강조하는 부분이다. 특히 유럽에서 지배계급은 학교를 통해 계급 재생산에 성공하고 있다. 문화적 취향의 형성 과정도 결국은 학교라는 공인된 국가기관이 규정하고 전파하는 이데올로기이다.
>> 최근 한국에서는 이런 상승 이동의 수단이 최근 강력하게 막히고 있지 않은가. 공간적으로는 강남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교육에서는 사립초-국제중-외고-SKY or 해외 라는 강력한 기제가 우수한 작동원리로 고착화되고 있고 (물론 그 과정에서 나오는 최근의 입시 비리, 이 문화자본 취득의 열쇠를 얻기 위한 전방위적 발악의 자연스런 귀결이겠다) 본능적으로 설국이 도래함을 알아차린 중간계급(허위적 문화에 경도된!) 이들은 꼬리칸에라도 탑승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지 않은가.
# 한국의 상류문화는 .... 늘 부패와 타락을 의미하고... 이것은 한국 사회의 권력 집단이 자신의 지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문화적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상류층은 이러한 의미에서 늘 불안하다.
>> 이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해 상류층이 시도하고 있는 것은 '꼬리칸 떼어놓기' 같은 작업이다. 어찌보면 설국열차는 정말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이론을 잘 반영한 정치적 영화가 아닌가.
# 사회 심층 면접에서 한국의 남성들이 좋아하는 것은 음악 그 자체가 아니라 '음악을 전공하는 여자' 라는 대답이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서양 고전음악 전공자가 '제도화된 문화자본' 으로 통용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부르디외의 문화자본 개념이 비교적 소홀하게 다루어온 성gender 라는 변수를 부각시키며, 이것이 한국 사회의 문화 연구에 중요한 쟁점이 된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 남자아이들은 한문이나 서예, 또는 과학경진대회, 여자 아이들은 피아노학원과 어린이 콩쿨을 어릴때부터 한번씩은 당연하게 보내고 있는 한국의 평범한 부모들이, 문화자본 획득을 통한 경제자본의 우회적 획득이라는 부르디외의 사회비판 개념을 얼마나 본능적으로 따르고 있었던 것인가.
# (학력자본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무능력은 개인적 감정으로 전이되어 스스로 언어 능력을 박탈당하고 타인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신의 대변자를 선택함으로서 자신의 발언권을 선택하는 암묵적 위임이고 무언의 자기 위탁이다. 이것이 '승인된 박탈' '체념적 인정' '타인에의 완전한 위탁' 이다.
>> 박근혜 선택의 사회구조적 귀결. 이 말 밖에는... 우리 사회가 정치적 권력을 시민들에 되돌리고 (80년대), 시민사회의 역할을 확장 (90년대) 해 오면서 얼마나 엘리트적 낙수효과에 기대해 왔고 계층적 소외를 심화해 왔는지 선거의 결과로 결국 드러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마지막으로 나를 비롯한 프랑스어 전공자들에 대한 저자의 일갈 하나.
# 불문학과의 나태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980년대 중반 미국에서는 인문학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문화학이라는 이름으로 텍스트 분석에 머물던 인문학의 범위를 확장시킨 바 있다. 테리 이글턴, 프레드릭 제임슨의 경우 알튀세와 그람시를, 1990년대에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푸코를 이용했고, 2000년대에는 후기 식민주의자들이 라캉과 부르디외를 활용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영문학을 필두로, 국문학 심지어는 스페인어학과서조차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통합을 모색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정작 불문학과는 여전히 텍스트위에서 잠자고 있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영문학 교수가 푸코 강의를 하고 있는데 불문학과는 시대 흐름에 무심하다.
>>공부하겠습니다요.. 푸코, 부르디외, 데리다, 지라르 책들을 쌓아놓기만 하고 펼치지 못하던 걸 반성하고 도전해 봐야겠음. (그렇다고 원서를 읽겠다는 건 아니지만...)
(201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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