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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프랑스소설

기묘한 한 쌍의 프랑스 소설 이야기


한 쌍의 소설을 소개하고자 한다. 기존 소설의 형식을 파괴한 이 두 소설은 기실 소설이 아니라 작가들의 삶 그 자체이다. 아래에 쓰는 것은 소설의 내용임과 동시에 소설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1980년대 후반, 불혹이 지나고도 아름다움을 간직한 프랑스 문학 교수이자 소설가 아니 에르노. 이혼 후에 그녀는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치유하고 있었다. 약간의 명성과 문학적 성취, 안정된 직업과 적당한 연봉을 가진 지식인이었던 그녀의 삶 속에 아직은 프랑스어가 익숙치 않은 한 동유럽인이 다가온다. 외교관인 그는 가족과 함께 파리에 머무르다 아니 에르노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소유욕과 정복욕에 불타는 아니 에르노는 그에게 끝없는 집착을 보이고, 다투고 헤어졌다가 다시 열정적인 관계를 반복하는 두 사람의 만남은 외교관인 남자가 가족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지속된다. 예정된 이별이었는지 처음에 담담했던 아니 에르노는 결국 또 다시 질투와 집착의 회오리 속에 빠지고, 외교관과의 관계를 (비록 실명을 쓰진 않았지만) 자전적 소설을 넘어 완전히 내면의 모든 진실을 꺼내어 쓴 '단순한 열정' 속에 담아 펴내기에 이른다. 

1991년 출간된 '단순한 열정' 은 곧바로 프랑스 전역에서 큰 반향을 가지고 온다. 미모의 중년 여교수가 외국인과 저지른 자신의 불륜을 가감없이 스스로의 소설 속에 담았다는 것. 과감한 성애 묘사와,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드러낸 충격적인 문장들. 불륜의 상대방이 받을 상처를 '단지 나는 자전적 글쓰기를 통해 내 문학적 세계를 표현한 것' 이라 변호하는 자세까지. 그것은 비록 이전까지도 아니 에르노가 자전적 소설로 유명세를 얻었던 작가였다 할 지라도, 과거 작품에서 다룬 그녀의 어머니나, 고향 이야기와 같은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아주 깊숙한 내면의 열정을 꺼내어 스스로를 대중앞에 전시해 버린 일대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수많은 매스컴이 달라붙었고, 많은 평론가들이 '단순한 열정' 을 놓고 열띤 찬반 논쟁을 벌였다. 수많은 독자들이 '천박한 성애담'의 주인공 아니 에르노를 경멸했고, 그보다 더 많은 독자들이 '소설속 자아의 해방자' 아니 에르노를 추종했다. 

1991년 파리 근교 루앙에 살던 스물 세살 청년 필립 빌랭의 아버지도 그 추종자 중 한 명이었다. 병적인 집착 때문에 아내에게 이별 선고를 받고 우울증에 걸린 그는 베스트셀러 소설 '단순한 열정' 을 통해 위로를 받으며, 아들 필립에게 아니 에르노가 참 미인이라는 소리만 되뇌인다. 아니 에르노가 누구인지 몰랐던 필립은, 대학에서 현대문학 전공을 택함과 동시에 운명과도 같이 '단순한 열정'에 사로잡혔고 급기야 아니 에르노에게 편지를 써 보내기에 이른다.

그리고 답장이 왔다. 처음에는 문학청년과 선배 소설가의 대화였지만 어느 새 편지는 문학적 열정에서 육체의 끌림으로 이어졌다. 결국 파리에서 필립과 아니 에르노는 첫 만남과 동시에 잠자리를 함께한다. 그것은 필립의 첫경험이었다. 연인 사이로 발전한 그들은 또 다시 서로의 몸에 집착하고, 서로의 시간을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치명적 사랑의 역사를 반복한다. 

어느 날, 필립은 그 사랑의 행동 속에서 무언가 기묘한 점을 발견한다. 관계 후 그의 체취를 고이 간직하겠다며 하루정도 안 씻는 것, 함께 그날의 운세를 읽는 것, 지하철의 거지들에게 적선하고 함께 소원을 비는 것.. 수많은 그녀의 행동이 사실은 과거 그녀가 쓴 '단순한 열정' 속에 묘사된 것과 소름끼칠 만큼 닮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필립이 느끼기에 사랑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아니 에르노의 내면적 욕망에 의해 발현된 반복적인 행동이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1997년 필립은 그녀에게 담담하게 이별을 고한다. 

1998년 플로베르 박물관에서 두 연인이 찌질하게 헤어지는 숨가쁜 장면부터 거슬러 올라가, 5년전의 만나는 날의 설레임까지, 연인의 섹스와 질투와 다툼과.. 집착과 폭력과 미움과 사랑과.. 그 모든 세부의 장면들과, 그 장면에서 솟아오른 감정들이 여과 없이 소설로 출간된다. '우리의 이별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 이야기를 글로 옮겨야 할 것 같다'는 필립 빌랭의 변명과 함께. 

필립 빌랭의 문단 데뷔작 '포옹'은 이렇게 탄생했다. 첫머리부터 끝까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의 거울처럼 병치되는 이 책은 단숨에 대중의 추문 속으로 휩싸였다. 인기 소설가와 젊은 문학청년의 30년의 나이차를 극복한 사랑, 그리고 이별. 소설에 묘사된 노골적인 성애담과 그로테스크하게 소설 안팎을 넘나드는 액자장치들이 사실은 모두 실제의 것이라는 사실. 또한 아니 에르노가 했던 기존 소설의 형식을 파괴하는 '모든 허구를 배제한 자전적 서술'이 필립을 통해 반복되며 그녀에게 결국 돌아온 깊은 상처. 그 모든 이야기들은 당연히 프랑스 호사가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필립 빌랭의 문학적 성취는 여전히 논해야 할 부분이 많다. 그가 '포옹' 뒤에 펴낸 몇 편의 소설 역시 아니 에르노가 끄집어낸 소위 '자기 상처를 스스로 후벼파기' 의 형식을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립 빌랭 스스로도 자신이 아니 에르노의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고 인정하고 있다) 

이 기묘한 문학 스캔들, 아니 에르노와 필립 빌랭의 두 소설은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우리는 이 소설들을 읽으며 어떤 느낌을 받게 되는가? '자전적' 이라는 틀을 벗어던진 아니 에르노의 형식이 다시 실제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로 바뀌어 등장했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을 상상하는 것은 무척이나 괴롭기도 하다. 또한 그네들이 각각 이별후에 글쓰기를 통해 얻었다고 말하는 '치유'가 사실은 또 다른 고통이 아니었는지 알 수 없어 난감하다. 정직함이 가져오는 상처, 내면의 모든 것을 꺼내어 빨랫줄에 전시한 것같은 두 소설을 보다보면 그들의 관음증과 노출증의 향연 속에 초대된 것과 같은 메스꺼움이 치밀어 오름과 동시에, 모든 걸 내던진 열정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경외심이 든다. 이런 이질적인 감정이 조금씩 양태를 바꾸어가며 끊임없이 교차하는 것, 그것이 바로 두 소설에 허구없이 그대로 그려진 치명적인 사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