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프랑스소설

김화영의 '이방인' 이정서의 '이방인'

# 최근 필명 '이정서'의 '이방인'이 화제다. 

한국 까뮈 번역의 최고봉으로 평가받아온 고려대 김화영 교수의 번역을 원색적으로 비판하며 새로운 번역을 내놓은 데다, 김화영의 번역과 원전을 조목조목 비교하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메모한 작가노트까지 한 권으로 공개했기 때문이다. 이 작가노트는 책으로 나오기 전에 이미 새움출판사의 홈페이지 블로그를 통해 연재되기도 했다. (http://saeumbook.tistory.com/443) 새움출판사는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온 '이방인'은 까뮈의 '이방인'이 아니다' 는 자극적인 카피로 공세에 동참했고, 김화영 교수는 여지껏 아무런 반응이 없다. 김화영 교수가 까뮈 전집을 출판한 민음사만이 '번역에는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다' 는 입장을 내놓았을 뿐이다. 




논란이 되는 부분은 지금까지 번역계에서는 있지 않았던 방식으로 이전의 번역 텍스트가 엉터리라는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 데다가, 그 대상이 김화영 교수였기 때문이다. 또한 사건의 중심에 있는 번역자 이정서씨가 필명을 쓰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기에 더욱 더 미스테리하게 궁금증이 증폭됐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정서의 '이방인'은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출판사의 보도자료만 보고 쓴 기자들은 처음엔 일제히 김화영 공격에 가담했고 (이정서 '이방인' 발행 초기에 제대로 책을 읽고 취재한 기자는, 그 견해의 찬반을 떠나서 내가 알기로는 한겨레 고나무 기자 정도 뿐이다) 번역 논쟁은 어느 새 선학과 후학의 태도 논쟁으로 변질되고 있다. 고나무 기자의 기사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정말 엉터리였을까?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32347.html) 에 대해 역자 이정서씨는 블로그를 통해 답변하며 자신의 견해를 조금씩 양보하거나 변호하기도 했다. (http://saeumbook.tistory.com/436) 

여기서 다시 한번 반전이 일어났는데, 그토록 공격적인 태도로 김화영을 공격했던 새움출판사의 이대식 대표가 새로 번역된 '이방인' 번역자 필명 '이정서'와 동일인이란게 밝혀진 것이다. 이 사실은 출판계 쪽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암암리에 알고 있던 내용이라는데, 서평가 로쟈 이현우의 블로그 글을 통해 크게 확산되었다. (http://blog.aladin.co.kr/mramor/6975946) 

여기서 두 가지 논쟁의 갈림길이 발생한다. 첫 번째는 '번역자 이정서=이대식 대표가 자신의 출판사의 마케팅을 위해 의도적으로 김화영 번역을 공격했다' 는 것. (이대식 대표가 영역본을 참조했고 프랑스어 전공자가 아니라는 등의 공격들은 일단 뒤로 하자. 해당 언어권의 전공자가 아니라도 좋은 번역은 나올 수 있다) 두 번째는 '많은 논쟁거리가 있다 하더라도, 김화영 번역의 문제점은 그 동안 불문학도들에게 많이 지적되 온 바이며 이정서 번역을 통해 진짜 까뮈의 문학세계가 밝혀졌다' 는 것이다. 

# 이 갈림길에 대한 정리를 나름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

1. 결론적으로 마케팅은 성공했다. 이정서의 '이방인'은 모든 인터넷 서점 문학부문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트위터 및 출판계의 반응은 두 가지로 또 다시 나뉜다. 죽어가는 문학 풍토에 신선한 마케팅과 새로운 번역에 대한 도전으로 뜨거운 바람을 일으켰다는 것, 반대로 옳지 못한 수단을 통해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겨 문학마저 물신주의의 덫에 걸린 꼴이라는 것. 전자는 그렇잖아도 돈도 안되고 배고픈 번역가에게 좋은 참고가 될 만한 돌파구였을 지도 모른다. 번역만 해서 밥먹을 수 없는 사회잖은가. 후자는 '책 판매를 위해 원로학자를 공격' 했다며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논쟁의 이면에 검은 가면이 씌여 있다 말한다. 그렇다면 이것이야 말로 까뮈가 그토록 이야기 하고 싶어했던 '부조리' 아니겠나. 

2. 위에서 언급한 것을 부연하지만, 프랑스 문학 전공자로서 까뮈의 원전을 읽어본 바로서는 '김화영 번역'의 '부족함' 을 지적하는 것에는 문제 없다는 생각이다. 이정서 번역이 지적하는 김화영 번역의 가장 큰 문제점은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자의적인 판단으로 까뮈의 인물을 왜곡했다' 는 것인데 일면 동감하는 바다. 등장인물들 중에 식당주인 셀레스트를 언변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그려버리며, 마리를 비롯한 많은 여성 캐릭터에게 수동적인 이미지들을 부여한 김화영 번역은 까뮈의 본래 생각과는 차이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김화영 번역의 '잘못' 이 아닌 '부족함' 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번역이란 행위도 문학활동의 일부이며 이정서 번역만이 절대적인 텍스트가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사람들은 지금까지 김화영 번역 때문에 '뫼르소는 햇빛 때문에 아랍인을 살해했다'고 알고 있다"는 이정서의 주장에는 공감하기 어렵다. 번역상에 약간의 난맥상이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정당방위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종교-국가라는 기존 권위의 부조리한 폭력성 때문에 기소되어 사형에 처해지면서도 끝까지 내면의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는 위대한 실존주의 인간상의 모델 '뫼르소' 를 국내 독자들이 정녕 모르고 있었을까? '햇빛 때문에 살인했다' 는 표현이 그 자체로 부조리함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걸. 

물론 다시 말하지만, 이정서의 김화영 번역 비판에는 수긍할 점이 꽤 많다. 디테일한 면을 들여다 보면, 동사 사용의 비 일관성이라든지 (Descendre 동사를 '해치워 버리다' '쏘아 버리다' 등으로 여러번 다르게 쓰기도 하며, Manquer 동사를 '농락했다' '골려먹다' 등으로 다르게 쓰기도 한다. 때로는 상황에 맞게 국어의 여러가지 표현을 쓸 수도 있겠지만, 그런 케이스에 해당되지는 않는 듯 하다) 또한 두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어 명사 Charges 를 두고 '수임료' 로 번역한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긴 하다 (이정서 번역본 p.100 처럼 '기소' 라는 적확한 뜻이 있기에) 

# 종합해 보면..

새움출판사와 이대식=이정서씨에게 까뮈를 제대로 알리고 싶다는 대외적인 구호 밖의 본심에 이런 마케팅적인 의도가 1% 없는 것이었나 라고 묻고 싶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답변이 나오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렇다고 이를 비도덕적인 만행이라고 몰아붙이기엔, 한국 출판계가 너무 경직된 도제 문화 속에서 온순하게 자라고 있는 것 아니었나 싶어 조심스럽다. 불과 10여년 전, 평론가 이명원의 김윤식 교수 실명비판이 행해진 때를 기억해 보라. 한국 문학계는 너무나 권위에 종속적이며, 소위 '주례사 비평' 에 익숙해져 기존의 것을 깨고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로쟈 이현우는 이 책의 역자 이정서=이대식 대표가 '이방인' 번역서와 동시에 김윤식-이명원 사건을 다룬 소설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 를 펴낸 것도 지적한다. 이정서가 자신의 위치를 '약자의 의로운 도전' 으로 프레이밍하려는 시도였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판단은 여러분의 몫.)

또한 그리 열심히 공부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으나, 불문학 전공자의 입장에서는 이번 논쟁이 너무나 반가울 따름이다. 특히 뫼르소의 저항과 시지프의 행복함을 이상적인 삶의 양태로 삼고 살아온 까뮈 실존주의의 팬으로서, 까뮈 탄생 100주년이었던 (1913년 11월생)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이렇게 많은 관심이 쏟아진다는 게 즐겁기도 하다. 

여전히 진행중인 이 번역논쟁은 아마도 새움출판사와 이정서의 사과로 마무리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전망해 본다. 일단 헤게모니를 쥔 쪽에서 집중 포화를 하기도 하거니와, 대중들의 인식 측면에서 '출판사 대표가 신분을 숨기고 책을 펴낸' 행위는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이정서의 번역이 단순히 책팔이를 위한 사기꾼의 무자비한 인신공격이라고 하기엔, 새로 번역된 '이방인' 의 그것에 더 눈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방식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의미있는 문학적 논의를 끌어내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다. 번역의 방식에 정작 핵심적인 내용이 묻혀버리고 있다. 이 정도로 빛나는 원전을 가진 문학작품은 그것이 탄생한 시점부터 항상 논쟁 속에 있었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얻어 나가고, 재해석된다. 그래서 고전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