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하네케의 영화 '피아니스트' 원작소설.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오스트리아 소설가로, 200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본인은 페미니스트라 주장하지만, 그를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反페미니스트라 공격당하기도 하며 과도하게 외설적인 문체로 (외설과 예술의 차이란!) 논란을 불러 일으키지만 그것 역시 포르노적인 남근중심 세계관에 대한 저항이라 읽히기도 하는, 여러 부분에서 이중적인 면모를 보인다 평가받는 작가.
소설에 등장하는 두 중심인물, 30대 후반의 비엔나 음악원 피아노 선생인 에리카, 그리고 공대출신 젊은 제자 클레머 역시 그런 이중적인 내면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다. 노모를 모시고 살며 어머니에게 갇힌 존재로 살아가는 에리카는 (번역자 이병애 교수는 오히려 라캉의 팔루스(남근) 개념으로 이 관계를 설명하는데, 어머니에게 있어 오래 전에 사라진 아버지의 존재를 에리카의 팔루스가 메우고 있다는 것. 물론 이 팔루스는 어머니가 임의적으로 설정해 놓은 것)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 의해 과도한 연습과 성실을 강요받으며 살아온, 성적-사회적으로 억압된 자아를 가지고 있다. 반면 스포츠와 예술, 육체적 정신적으로 상반되는 두 가지 분야에서 모두 성취를 이루며 마치 허큘리스적 완벽한 인간으로 살아온 클레머는, 또래 여인들의 아름다운 젊음 보다 예술적인 이상에 심취해 스승인 에리카에 대한 정복욕을 숨기지 않고 있다.
또한 에리카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평소 강습 중에는 잔혹하게 학생들의 실수를 지적하고 있다가, 클레머에게는 자신을 묶고 때려줄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전이된 피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자아를 삶에서 해소하지만, 억눌린 잠재의식 에서는 결코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또한 계속해서 슈베르트를 언급한다. 작고 뚱뚱하고 못생겼는데다, 평생 음악적 인정을 받지 못했던 슈베르트. 그러나 너무나 맑은 내면을 지녔고 지옥같이 슬프면서도, 동시에 아름답고 순수한 음악을 만들어냈던 슈베르트. 그 슬픈 대조를 에리카에게 계속해서 투영한다. (에리카 역시 슈베르트를 주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 나온다)
어찌보면 이 소설을 전개시키는 동력은 폭력과 외설적 욕망들이다. 지배하고 싶은, 지배 당하고 싶은 욕망과 그 욕망을 실현시키는 폭력(클레머의 에리카에 대한 폭행), 예술의 완성에 대한 갈망과 그 불가능함에서 오는 좌절(세계적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에리카의 좌절에서 엿볼수 있는). 그리고 그것을 해소하는 수단으로서의 성. 또다시 억압당한 성적 욕망을 사회적 권력을 활용한 폭력을 해소하는 그 끊임없는 굴레가 소설 속의 진짜 핵심 구성 요소가 아닌가 싶다.
또한 이 소설은 끊임없이 사물과 인간에 대한 수많은 비유를 토해낸다. 독일 현대문학의 특징이기도 한데, 난해한 묘사와 깊은 설명이 필요할 정도로 추가적 지식을 요하는 문장들이 겹겹이 쌓여있다. 이에 독서의 흐름을 저해한다는 비판도 있다 하는데, 한국어 번역이 워낙 훌륭하기도 할 뿐더러, 미하엘 하네케의 영화를 먼저 본 사람들은 인물과 공간의 이미지들을 자연스럽게 중첩시키며 몰입할 수 있어서 독서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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