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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한국소설

'혀 끝의 남자' 백민석





백민석이 돌아왔다는 건 내게 관심 밖이었다. 
그의 소설, 그 자체가 문제라 생각했다.

분노와 똘기로 가득찼다는 그의 전작이나, 10년간의 잠적 역시 그저 보도자료를 위한 화젯거리에 불과한 것 같다.
그의 소설, 그 본질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10년간의 잠적의 흔적이 소설 속에 드러나는 것은 또 어쩔 수 없지 싶었다. 
인도에서 여러 도시를 오가며 겪는 한 남자의 '표피적으로는' 평범한. 그리고 '내면적으로는' 괴이한 여행기인 '혀 끝의 남자' 는 마치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 을 연상케 한다. 

끝없이 외롭고, 외면받고, 목적없이 떠도는 '여행자' 가 아닌 '방랑자' 
인도라는 혼돈스러운 (외지인에게는 더 혼돈의 공간) 곳에서 화자는 끊임없이 자기를 바라보지 못하고, 타자를 주시한다. 한국 남녀들을, 백인 여자를, 코끼리를, 쇠똥을. 계속 하염없이 바라보며 떠돌고, 비로소 자신이 감각을 인식하는 것은 무더운 사막에서 흡입한 해시시가 혀에 닿아 엄청나게 건조하고 뜨거운 고통을 안겨줄 때였다. 

타자의 슬픔과 기쁨, 행복과 고통을 단지 바라보면서 공감치 못하다 슬그머니 극단의 지점에서 대중속으로 흡입되는 그 절명의 고통, 작가 백민석이 지난 절필의 기간 동안 고민했던 지점이 이것일까.

바라보는 것은 쉽다. 자신의 언어와 발톱을 감추고 그저 관조하는 것은 무감각의 평안함을 안겨준다.
글을 토하는 것은 고통이다. 내 말글이 활자화되어 대중 속으로 인입되는 것은 고통이다. 두려움이다.

10년만에 그 두려움을 뚫고 등장한 백민석. 그러나 여전히 발톱은 무디고 형이상학 속에서 작가는 어디까지가 자신의 언어이고 대중의 요구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 하다. 
작가의 마지막 말 처럼, 여전히 그에게 가장 큰 독자는 자기 자신이다. 다음 번 소설은 그 '자기'의 공간에 대한 대중의 점유를 조금 더 허락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