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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한국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vs '살인자의 건강법' 아멜리 노통




김영하의 신간 '살인자의 기억법' 이 화제다. 그런데 아마 이 소설의 제목에서 벨기에 소설가 아멜리 노통의 '살인자의 건강법' 을 떠올린 독자들이 꽤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김영하는 왜 이런 제목을 달았을까? 아멜리 노통의 소설과는 관계가 있을까? 관계가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나? 궁금할 것이다. (혹시 나만 궁금한 건 아닐까..)

지난 10여년 동안 아멜리 노통의 소설을 좋아해 왔기에 약간의 책임감(?) 을 느끼며 두 소설 사이에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코드들을 파헤쳐 봤다. (김영하 소설가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짙게 드러나는, '살인자의 건강법'이 '살인자의 기억법' 과 대응되는 부분들을 보며, 나는 김영하 소설이 노통에 대한 오마쥬 혹은 리크리에이티브 텍스트라 확신한다. 적어도 김영하가 '살인자의 건강법'을 자세히 읽었다는데 백원 건다)

*주의. 스포일러 다량 함유



# 주인공의 설정

두 소설 모두 '병에걸린. 남성. 노인. 살인자' 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건강법' 에서는 노벨상까지 탄 대문호지만 연골암에 걸려 두달 시한부 인생인 소설가 '프레텍스타 타슈'. '기억법' 에서는 연쇄살인범이지만 한 번도 잡히지 않고 살아온 수의사 출신 '김병수' 


# 살인이 시작된 시간과 정지된 시간. 그리고 다시 살인한 대상

김병수는 16세에 아버지를 죽임으로 첫 살인을 한다.
타슈는 17세에 사랑하는 사이인 사촌누이 레오폴린(빅토르위고 소설의 주인공과 이름이 같은.)을 죽임으로 첫 살인을 한다.

김병수는 25년 전 마지막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프레테스타 타슈는 24년 전 절필했다. (나중에 밝히지만 이 소설의 진정한 주제는 '글' 즉 문학이다. 타슈는 글로서 인간성의 말살 혹은 정신의 죽음을 시도했기에 '절필'의 의미는 '살인의 마감' 을 의미한다 해도 무방하겠다)

김병수는 소설의 마지막에 사랑하는 딸 은희를 죽인다 (나중에 밝혀진 진실. 은희는 딸이 아니었다)
타슈는 소설에 마지막에 사랑하게 된 기자 니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니나는 마지막 순간, 타슈라는 미치광이의 화신으로 변하여 스스로 타슈와 같은 존재가 된다. 죽은 것은 타슈일까 니나일까.)


# 소설 속 '진실' 

김병수는 치매 환자다. '기억법' 속 진실은 끊임없이 충돌하고 뒤집히며 혼란에 빠진다. 주인공 김병수는 망각의 상징이 된다. 

'건강법' 의 주인공 프레텍스타 타슈의 이름은 Pretextat Tach. 누가 봐도 pre-text (텍스트 이면의 것. 문학적 진실을 말함) / tach (프랑스어로 '얼룩') 을 얘기하고자 함을 알 수 있다. 프레텍스타 타슈라는 주인공의 이름은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존재 라는 것인데 사실은 엄청난 허위와 위선의 상징인 주인공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듯 보인다. 


# 피. 붉은색 / 숲. 초록색

'기억법' 속에서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나는 그 시를, 첫날밤에 신부를 살해하고 도주한 신랑 이야기로 읽었다.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 그리고 시체. 그걸 어떻게 달리 읽겠는가?'

'건강법' 에서 타슈는 17세의 레오폴린이 숲속 호수에서 초경을 하자 죽인다. 

'기억법' 에서 김병수의 딸(로 뒤틀려 설정된) 은희는 16세에 학교에서 '피'에 대해 처음 배웠다고 한다.

'건강법' 에서 레오폴린의 초경은 '암록색 물 속에서 흰 빛이 (육체를 상징) 비쳐 보이다가 붉은색 액체가 떠올랐다' 고 묘사된다. 

'기억법' 에서 은희는 식물연구소에서 일한다. 녹색 식물들 사이에서 흰 가운을 입고 있다. 


# 기억의 도구

김병수는 목에 걸어둔 녹음기를 통해 끊임없이 현재를 기록한다. 기억하기 위해. (박주태를) 살인하기 위해. 

타슈는 손에 늘 들려있는 펜으로 끊임없이 쓴다. 망각하지 않기 위해. 글로서 살인(과 같은 행위) 하기 위해.


# 미완성의 작품

'기억법'의 김병수는 소설 속 다른 등장인물 박주태를 죽이는 게 '살인하던 시대' 로 돌아가서 과거를 '복원'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살인계획은 이뤄지지 못한다. 미완성.

'건강법' 의 타슈는 마지막으로 남겨둔 미완성 소설 '살인자의 건강법' (실제 소설의 제목을 작품 속 미완성 소설로 쓴 것) 을 완성 시키기 위해 과거의 살인을 기자 니나 앞에서 복기한다. 이 소설도 결국 완성되지 못한다. 


# 소설의 주제의식

'기억법' 의 주인공은 사실 김병수가 아니다. '시간' 이다. 망각(치매) 의 세계 속에서 기억되는 것은 진실도 거짓도 아니다. 결국 모든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흘러가버린 '시간' 이다. 어질러진 시간의 종국에 진실은 파괴된다.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장식된다. '소리도 진동도 없는 이 세계가 점점 작아진다.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하여 하나의 점이 된다. 우주의 먼지가 된다. 아니, 그것조차 사라진다'

'건강법' 의 주인공은 '문학' 그 자체이다 (번역자 김민정의 견해) 타슈와 니나의 토론을 통해 문학의 본질은 무엇인지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복원되는 진실 (타슈의 살인고백) 은 결국 완성되지 못하고 (미완성 소설) 소멸된다 (타슈의 죽음) 


# 결론

두 소설 모두, 결국 '진실이란 것. 진실이라 믿고 있는 세계의 불완전함' 을 이야기 한다. 이 거대한 매트릭스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나는 살인자 (망각하는 인간의 본질적 한계) 가 된다. 

(201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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